2023. 9. 16. 22:50ㆍ인천강화
[230916] 강화도 여행
초지진~덕진진~광성보~동막해변~분오리돈대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둘러보며 역사속에 머물다 비 내리는 동막해변 모래사장은 최고의 어싱이었다.
새벽5시 집에서 나와 해수탕에서 목욕재계하고 생선구이로 아점하고 걷기 이어간다.
초지진
조선후기 해상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구축한 진지, 사적 제225호. 1716년(숙종 42) 강화 해안을 지키기 위해 조직되었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적지이기도 하다.
덕진진
사적 제226호. 덕진진은 1679년에 축조된 용두(龍頭)·덕진 등 2개 돈대와 1874년(고종 11)에 축조된 남장(南障)·덕진 등 2개 포대를 관할하는,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는 치열한 포격전 끝에 미국함대를 격퇴시켰으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 때 성첩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지(門樓址)만 남게 되었다. 1976년 돈대와 성곽을 보수하였으며 홍예(虹霓 :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광성보
사적 제 227호. 고려시대 몽고 침입에 대항하여 흙과 돌을 쌓아 강화외성을 쌓았다. 광해군 때 이를 고쳐 쌓았고 효종 9년(1658)에 여기에 광성보를 만들었다. 숙종 때는 광성보 안에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의 소속 돈대가 완성되었다. 신미양요(1871)때 광성보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해병 450명으로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은 극동함대의 함포 지원사격을 받으며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화력의 열세에도 끝까지 싸워 중군장 어재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을 비롯한 49인의 장사와 200여명의 군사가 전사하였다. 이때 파괴된 누각과 성곽 등은 1976년 복원되었다. 현재 광성보에는 어재연 등 장수들의 용맹을 기린 쌍충비각과 무명 병사들의 무훈을 기린 무명용사비가 세워져 있다.
단풍나무와 소나무 빽빽한 숲, 가을에 다시 오기로.
돌아오는길엔 산책길로
무명용사비
커피 워킹
수자기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동막해변 어싱
모레 어싱 최고다
뻘 걷기 후 샘물로 세족
똑같은 색 갈매기와 갯벌
분오리돈대
돈대는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접경 지역이나 해안 지역 등의 군사 요충지에 세운 초소이다. 이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 1628∼1701)가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 1634∼1684)의 명령을 받아 경상도 군위의 어영군 8천 여명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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